전쟁과 전염병의 불안감처럼
코로나 입원환자가 한 달 만에 10배 이상 늘어나는 등 재확산의 기미가 엿보인다. 방역 당국은 8월 말 초`중학교 개학이 시작되면 코로나 가 더욱 확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염병은 전쟁이 일어나거나 사회가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때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류성룡의 ‘징비록’에 이어 임진왜란 3대 기록물로 꼽히는 ‘쇄미록(瑣尾錄)’은 1591년부터 1601년까지 9년 3개월 동안 오희문이 쓴 일기로 당시 전염병에 의한 백성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희문은 양반의 자제로 그럴듯한 벼슬은 없었으나 그의 아들 오윤겸이 영의정을 지냈고,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서파 오도일과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오명항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특히 오도일은 숙종 때 민언량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으로 귀양 와서 오도일은 이때 장성의 여러 경승지를 시로 남기기도 했다.
오희문은 1592년 12월 23일(음) 장성에 와서 머물렀는데 당시 장성현감 이귀가 처사촌이었기 때문이다. 이귀는 인조반정 이후에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장남 이시백도 영의정에 이르렀고 차남 이시방은 공조판서와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오희문의 일기에 12월 24일 장성의 냇가에서 쑥국을 맛있게 끓여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 왜적의 노략질과 살육 못지않게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전염병이었다. 조선시대 전염병으로는 콜레라, 천연두,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었는데 임진왜란 때는 이질과 학질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질은 장염의 일종으로 대변에 피와 고름이 섞여나오는 증상을 보이며 쇄미록을 쓴 오희문과 그의 어머니가 이질로 고생을 하였고, 계집종 동을비와 큰아들 윤겸의 아이가 이질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학질은 말라리아에 감염된 모기가 사람을 물면 사람의 혈액 속으로 말라리아가 감염되어 발생하는 질병으로 설사. 구토, 발작과 고열이 나타나는 병인데 오희문의 막내딸인 단아가 학질에 걸려 고생하다가 죽었다. 학질은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매우 어렵거나 힘든 상황을 모면하느라 고생하거나, 완전히 질려 버리는 상황을 ‘학을 떼다’고 할 정도다.
오희문은 막내딸이 학질로 세상을 떠나자 “마음이 지극히 애통하여 가슴과 창자가 찢어지는 듯하다”며 훗날에도 “좋은 날에 좋은 음식을 보면 문득 슬픈 눈물을 그칠 수 없으니 막내딸이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한편 오희문의 증손자로 장성으로 귀양 와서 죽은 서파 오도일은 문장이 뛰어나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로 불렸는데 워낙 술을 좋아하여 숙종으로부터 과음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기도 하였다. 오도일은 이조판서로 있을 때 기우제에서 술을 올리는 작주관을 맡았는데 이미 술에 취해 음복주를 발로 걷어차서 쏟았다고 할 정도다.
오도일이 장성으로 귀양갈 때 금부도사에게 “장성에도 소주가 있가?”라고 하니 금부도사가 “어디라고 소주가 없겠소.”하니 오도일은 “그러면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오도일은 장성에 귀양 와서 1년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오도일의 증조부인 오희문도 술을 좋아하였다. 오희문은 막내딸 단아의 병세가 악화되자 아침을 거르고 술을 마셨는데 ‘시름을 없애는 데는 술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오도일의 손자인 오태증도 성균관 제술 시험에 합격해 창덕궁 희정당에서 정조를 만났는데 정조의 술자리 ‘규칙’은 ‘취하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는다’ 것이었다. 태증은 정조가 내린 소주 다섯 잔을 마시고도 멀쩡해서 정조가 큰 잔으로 소주를 내렸다고 전한다.
하여튼 쇄미록을 쓴 오희문과 그의 처사촌 이귀 그리고 오희문의 증손자인 오도일이 모두 장성에 살았으니 이들과 장성이 적은 인연은 아니다. 오희문의 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과 전염병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인심을 피폐하게 한다. 대한민국의 현 상황이 임진왜란의 전란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국민의 불안감은 그 어느 때보다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