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에서 나오는 계곡물이 마을 앞을 지나 평산리로 흐르고 마을 바로 북동쪽에 백운제, 서쪽 약 1km에 외마재가 축조되어 있으며 마을 동쪽과 북서쪽, 남쪽이 들로 조성되어 있다.
마을의 모습이 바닷가의 배 모양이고 옛날에는 이곳이 바닷가로 배가 드나들던 곳이라 하여 선평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원래는 한마을이었던 선창마을 역시 바닷가의 부둣가 부분이어서 선창마을이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약 500여 년 전부터 청송 심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선평마을에는 지금도 심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때 부터는 여러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에 가구 수가 많을 때는 20~30여 가구가 살았었기에 아이들도 많아 인근의 남면서국민학교가 아이들로 가득했었으나 지금은 가구 수도 10여 가구로 줄어들고 아이들도 없어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 됐다.
마을에 살고 있는 심의동(76)씨는 “내가 남면 서국민학교를 나왔는데 지금은 폐교가 되서 없어졌다. 그때만 해도 마을에 아이들이 많아 우리 마을에서만 열댓 명씩 서국민학교를 다니기도 했다”며 “그때만 해도 마을이 정도 많고 사람도 많아 재미있었다”고 추억했다.
이어 그는 “마을에서 가끔 닭을 서리해서 잡아먹은 적도 있었다.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지만 예전 시골인심에는 가능한일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남의 집 닭을 찾아 산을 넘어 다니기도 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마을사람들에 말에 따르면 마을에서는 관직에 종사한 사람이 많이 배출됐는데 이조때 진사를 지냈던 인물도 3명이나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육군 소령, 한국전력공사 부장, 향교 전교,남면 면장, 부 면장, 초등학교 교장 등 인물이 많이 배출됐으며 심상명 전 법무부 장관이 나고 자란곳이기도 하다.
장성댐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오로지 비를 기다려야하는 천수답 농사라 논농사를 짓는 집과 밭농사를 짓는 집의 숫자가 비슷비슷했으나 장성댐이 생기고 나서는 대부분 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심씨는 “대부분 농업으로 먹고 살았다”며 “장성댐이 생기기전에는 콩, 조, 보리 등도 많이 재배했는데 댐이 생기고 나서는 논농사를 많이 했다. 쌀이 중요하던 시절이었고 장에서 쌀이랑 물물교환도 해주고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버스도 다니지만 예전에는 산을 넘어서 장성장, 임곡장, 비아장 등을 다녔는데 가면서 쌀이나 계란을 들고 가서 석유나 비누, 성냥 등을 사오기도 했다”고 이야기 했다.
현재는 논 농사도 많지만 감나무를 많이 기르고 있는데 인근의 자풍마을은 감나무를 가지고 가을이면 체험농장도 열고 직접 감을 판매하기도 하는 행사를 매년 열고 있다.
마을 앞으로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2009년도로 원래는 마을에서 약 700m가량 떨어진 곳에 버스가 정차했었으나 지금은 도로가 좋아져 마을의 입구까지 버스가 왕래하며, 광주로 가는 버스 편도 자풍마을까지 연장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신평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며 남면서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라는 심상호(81) 씨는 “마을에서 땔감으로 쓸 나무를 여름에 해두고 가을에 한꺼번에 내리는 날이 있었는데 그날은 마을사람들이 다 나와서 함께 나무를 마을로 옮기고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정말 신나는 잔칫날 같은 분위기였다”고 이야기 하며 미소 지었다.
지금도 위친계를 하고 있어 1년에 서너 번씩은 마을의 모임을 연다는 신평마을 사람들.
마을 사람들 간에 끈끈한 정과 훈훈하고 넉넉한 인심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