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는 방마다 책장이 있다. 생업에서 은퇴하고 두어 차례에 걸쳐 지역 학교와 문화원에 책을 많이 기증했는데도 남은 책이 아직도 꽤 된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골라내 다른 곳에 보낼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게 쉽지 않다.
그럴 것이 이미 골라내고 남은 책들이라 다른 곳으로 기증할 책이 얼른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 많은 책들을 앞으로 내가 다 읽어낼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벌써 왕성한 독서욕 같은 것이 시들해졌다. 글을 쓰기도 바쁘고 책을 읽는 시간도 모자란다.
나이도 들어서 눈이 침침하고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곧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책을 굳이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냉정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때 나의 생업에 불가결한 존재였던 책들이 자칫 나로부터 버림을 받을 운명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책을 읽고 쓰고 만들고 하는 그런 일들 말고는 이 생전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책과 더불어 지내는 것을 내 운명처럼 여기고 살아왔다. 책장에 남아 있는 책들은 한 권마다 나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
책방에서 사온 책들, 중고서점의 먼지구석에서 발견하여 구입한 책들, 우편으로 주문한 책들, 기증받은 책들, 나는 책을 빼서 넘겨보고는 다시 꼽아 놓는다. 도저히 골라내 다른 곳으로 보낼 마음이 나지 않는다. 책을 보내면 나와 얽힌 이야기들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어떤 책은 하도 오래 되어서 책종이가 낡아 잘못 펴면 부스러지기도 한다. 책 한 권을 들고 그 책과의 인연을 떠올려 본다. 책 가운데는 법정 스님이 생전에 사인을 해서 주신 책도 있다. 그런 식으로 나와 소중한 인연을 맺은 책들을 나는 도저히 다른 곳으로 보낼 수가 없다.
읽지 않은 책들도 많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첫째 권을 읽다 말고 여덟 권이나 되는 전집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못 읽고 있다. 더 급한 읽을거리 책이 계속 내 주의를 끌기 때문에 나는 마치 책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 같은 기분이 든다.
한때 온 집안이 책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고 자부심 같은 것을 느낄 때도 있었다. 부자가 된 기분이랄까. 어쨌든 나하고 책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다. 그런즉 이제 와서 사정이 변해간다고 더욱 애지중지해온 책들을 모아 다른 곳으로 기증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
냉정히 생각해볼 때 읽을 책이 아니라면 간직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책은 누군가가 읽어 주어야 생명력을 얻는다. 그냥 책장에 비치해두고 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이래저래 고민이 된다. 내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책상에는 읽느라 펴놓은 책과 돋보기안경이 있었고, 방안의 책장에는 책들이 가득해 있었다. 주인을 잃은 책들이 뻘쭘해 보였다. 그 후로 그 책들이 다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 식으로 주인의 운명에 따라 책의 운명도 달라진다.
여러 해 전에 기증했던 내 책들은 잘 읽히고 있을까. 간혹 그런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종이책들은 안타깝게도 예전처럼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문화원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렇게 잘 읽히지 않는 듯싶다.
학교는 입시 준비에 시달려서 입시 참고서가 아닌 책을 읽는 학생이 드물고 문화원은 거의 구색을 맞추어 비치용처럼 있어 누가 와서 찾아 읽는 사람이 드문 것 같다.
흔히 말하듯 책 속에 길이 있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책 속에 딴 세상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내 경험에 의하면 책을 읽는 시간은 참선을 하는 시간과 비견된다. 세상 고락을 다 잊고 책 속으로 들어가 그 다른 세상의 주민이 되어 지내는 일은 현실도피 이상의 높은 정신 세계를 탐험하거나 순수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황의 시조에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봬’하는 구절이 있는데 책이야말로 못 보는 옛 사람들과의 행복한 대화 시간을 제공한다. 그 이상 기쁜 시간을 어디 가서 찾겠는가. 그렇더라도 일단 책들을 골라내 보내고 나머진 다 읽겠다는 마음을 다잡아 본다.
출처 : 시민의소리(http://www.siminsori.com)
그럴 것이 이미 골라내고 남은 책들이라 다른 곳으로 기증할 책이 얼른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 많은 책들을 앞으로 내가 다 읽어낼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나는 벌써 왕성한 독서욕 같은 것이 시들해졌다. 글을 쓰기도 바쁘고 책을 읽는 시간도 모자란다.
나이도 들어서 눈이 침침하고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곧 잊어버린다. 그렇다면 책을 굳이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냉정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때 나의 생업에 불가결한 존재였던 책들이 자칫 나로부터 버림을 받을 운명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책을 읽고 쓰고 만들고 하는 그런 일들 말고는 이 생전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책과 더불어 지내는 것을 내 운명처럼 여기고 살아왔다. 책장에 남아 있는 책들은 한 권마다 나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다.
책방에서 사온 책들, 중고서점의 먼지구석에서 발견하여 구입한 책들, 우편으로 주문한 책들, 기증받은 책들, 나는 책을 빼서 넘겨보고는 다시 꼽아 놓는다. 도저히 골라내 다른 곳으로 보낼 마음이 나지 않는다. 책을 보내면 나와 얽힌 이야기들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어떤 책은 하도 오래 되어서 책종이가 낡아 잘못 펴면 부스러지기도 한다. 책 한 권을 들고 그 책과의 인연을 떠올려 본다. 책 가운데는 법정 스님이 생전에 사인을 해서 주신 책도 있다. 그런 식으로 나와 소중한 인연을 맺은 책들을 나는 도저히 다른 곳으로 보낼 수가 없다.
읽지 않은 책들도 많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첫째 권을 읽다 말고 여덟 권이나 되는 전집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못 읽고 있다. 더 급한 읽을거리 책이 계속 내 주의를 끌기 때문에 나는 마치 책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 같은 기분이 든다.
한때 온 집안이 책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고 자부심 같은 것을 느낄 때도 있었다. 부자가 된 기분이랄까. 어쨌든 나하고 책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관계다. 그런즉 이제 와서 사정이 변해간다고 더욱 애지중지해온 책들을 모아 다른 곳으로 기증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
냉정히 생각해볼 때 읽을 책이 아니라면 간직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책은 누군가가 읽어 주어야 생명력을 얻는다. 그냥 책장에 비치해두고 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이래저래 고민이 된다. 내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책상에는 읽느라 펴놓은 책과 돋보기안경이 있었고, 방안의 책장에는 책들이 가득해 있었다. 주인을 잃은 책들이 뻘쭘해 보였다. 그 후로 그 책들이 다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 식으로 주인의 운명에 따라 책의 운명도 달라진다.
여러 해 전에 기증했던 내 책들은 잘 읽히고 있을까. 간혹 그런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종이책들은 안타깝게도 예전처럼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문화원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렇게 잘 읽히지 않는 듯싶다.
학교는 입시 준비에 시달려서 입시 참고서가 아닌 책을 읽는 학생이 드물고 문화원은 거의 구색을 맞추어 비치용처럼 있어 누가 와서 찾아 읽는 사람이 드문 것 같다.
흔히 말하듯 책 속에 길이 있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책 속에 딴 세상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내 경험에 의하면 책을 읽는 시간은 참선을 하는 시간과 비견된다. 세상 고락을 다 잊고 책 속으로 들어가 그 다른 세상의 주민이 되어 지내는 일은 현실도피 이상의 높은 정신 세계를 탐험하거나 순수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황의 시조에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봬’하는 구절이 있는데 책이야말로 못 보는 옛 사람들과의 행복한 대화 시간을 제공한다. 그 이상 기쁜 시간을 어디 가서 찾겠는가. 그렇더라도 일단 책들을 골라내 보내고 나머진 다 읽겠다는 마음을 다잡아 본다.
출처 : 시민의소리(http://www.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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