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란 붇다가 어느 날 설법이 끝난 뒤 말없이 꽃 한 송이를 들자 그 뜻을 아무도 몰랐으나 수제자인 가섭이 그 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이와같이 문자로는 세울 수 없는 진리를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는데 선종(禪宗)에서는 해탈의 경지는 도저히 언어를 통해 밝힐 수 없다고 본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아는 이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하였고,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는데 선교(禪敎)의 불립문자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선문답은 상식과 형식을 초월하고,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을 뛰어넘는다. 선사(禪師)의 선문답은 마치 날 선 칼날과 같이 예리하고, 때로는 홍두깨보다 더 무겁게 머리를 내려친다. 선사의 선문답은 생각할 시간도 머뭇거림도 없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한순간에 어둠을 밝히는 번개처럼 번뜩이는 지혜가 있다.
그 어둠을 밝히는 과정 곧 의심을 깨우치는 과정을 화두라고 한다. 화두는 앉으나 서나 말하거나 침묵하는 동안에도 놓지 않아야 한다. 이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도 화두를 놓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성질인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젊은 수좌가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고 묻자, 조주는 망설이지 않고 “없다”고 했다. 선문답은 논리와 이치를 묻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수좌가 운문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진리)입니까?”라고 묻자 운문은 “똥막대기”라고 대답했다. 이런 선문답이 화두가 되고, 의심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선사의 대답은 묻는 이에게 다시 질문하는 형식으로 이어지며 그 질문은 깊은 사유(思惟)와 깨달음에서 나오는 비수(匕首)와 같은 것이다. 무언의 언어이고 무형식의 형식이 선문답이다. 그래서 이를 살아있는 언어라는 뜻으로 활구문답(活句問答)이라고도 한다.
언론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선문답하듯 한다고 평한다. 질문의 요지와 동떨어진 대답을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럴 땐 선문답이 아니라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고 해야 한다.
한마디로 무식한 답변이라는 말이다. 선문답은 형식과 언어를 초월한 살아있는 언어다. 동문서답과는 전혀 다른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