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냥년’이란 바람기가 있거나 몸을 파는 여성 또는 몸을 함부로 굴리는 문란한 여성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하지만 화냥년은 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끌려갔던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은 약 60만 명 정도인데, 이 중 50만 명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이 귀국하자 엄청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오랑캐 땅에서 종처럼 살며 고생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기는커녕 그들이 오랑캐의 성(性) 노리개 노릇하다 왔다고 하여 몸을 더럽힌 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병자호란 이전 임진·정유란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환향녀들은 가까스로 귀국한 뒤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는데, 선조와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다.
심지어 영의정 장유의 며느리도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시부모로부터 이혼 청구를 당했다. 처음에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장유가 죽은 후 시부모에게 불손했다는 이유를 내걸어 결국 이혼시켰다고 한다.
환향녀들이 사회 문제가 되자 인조는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여성들에게 “홍제원의 냇물(오늘날의 연신내)에서 목욕을 하고 서울로 들어오면 그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환향녀들의 정조를 거론하는 자는 엄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환향녀의 남편들은 이혼은 하지 않더라도 다른 첩을 두고 죽을 때까지 돌아보지 않는다거나 갖은 핑계를 대서 스스로 나가도록 하였고,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의 경우에는 스스로 자결하거나 문중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등, 수많은 환향녀가 죽을 때까지 수모를 받았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한 드라마에서 오랑캐에게 잡혀간 포로 중에 “자식은 부모를 찾으러 오고, 부모도 자식을 찾으러 오며 아내는 남편을 찾으러 오지만 남편이 아내를 찾으러 오는 경우는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포로로 잡혀간 가족을 찾으러 ‘속환금’을 주고 데리러 오지만 남편들만은 오랑캐에게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아내를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