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군 98세 최고령 6.25 참전유공자 전계근 옹
올해의 반이 지나가는 길목이자 초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6월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우리 고향의 참전유공자 한 분을 만났다. 올해 98세의 전계근 옹이다.
전계근 옹은 1927년 12월 장성읍 상오리 우지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성산 초등학교를 졸업 후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살았다. “부모님이 나를 두 살 늦게 29년으로 출생 신고하셨지. 그래서 나는 1938년에 일본군으로 끌려가지 않았어”라며 일본군에 징용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말했다.
해방 직후 20세가 되던 해 전 옹은 평화롭게만 보이던 마을도 주민들끼리 서로 다른 이념으로 갈등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보수적 역사관을 가진 전 옹은 좌익 계열의 남조선노동당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방법이 국군에 복무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49년 4월에 입대를 결정했다. 삼척으로 자대배치 받고 기초군사훈련도 없이 곧바로 작전에 투입된 그는 빨치산 활동이 심한 태백산에서 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전쟁이 나던 1950년 6월 25일 8사단 21연대 1대대 2중대 1소대에 배치되었던 전계근 하사는 그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부대가 다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전쟁이 일어났어. 처음엔 주문진, 강릉 방어하다 인민군이 물밀듯이 들어오니 제천, 단양, 풍기, 영주까지 내려갔지”라며 또렷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했던 전쟁에서 전 하사는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던 경북 영천에서 벌어진 영천대첩에서 마지막 보루를 방어했다.
영천대첩으로 1계급 특진한 전계근 이등중사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여 연천, 철원, 강원도 평강, 평양으로 진격했고 평안남도 덕천을 거쳐 결국 한반도의 최북단 가까이 평안북도 선천에 도착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 이후 50년 12월 몇몇 소대원과 함께 평안남도 순천, 평양, 연천으로 후퇴하다 철원 일대에 숨어있던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힌 그는 평양에 있는 강동 포로수용소로 억류되었다. “탄광 1개 호에 스무 명씩 들어가 막노동도 하고 아군이 폭격한 인민군 물자 운송교랑 및 진지를 그 일대 주민들과 같이 보수했어. 열병을 포함 온갖 질병으로 전우들이 죽어 나갔지”라며 한숨을 내쉬며 그때의 고난을 떠올렸다.
시간이 흘러 휴전 협정과 더불어 포로 교환에 관한 남·북 양측의 논의가 오갈 동안 그는 평양 서성과 백두산 밑 자강도 자성 포로수용소에 이송되었다. “기차 타고 개성에 도착해서 한국군에 우리를 넘겨줬어. 그 이후에 배를 타고 거제 앞바다 용초도에서 한 달 동안 교육과 심사를 받았지”라며 휴전 후 포로수용소에서 남쪽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했다.
포로수용소에서 아군으로 판명된 후 20일 휴가를 받은 그는 고향 땅에 계신 부모님을 뵙고 부대 복귀 후 1계급 특진, 일등 중사로 54년 4월 20사단 60연대에서 만기 전역했다. 고향 땅에 돌아온 전계근 옹은 28살의 나이에 고(故) 임문선 여사와 결혼하여 7남매를 낳아 키우고 농사를 지었으며 현재 평화로운 여생을 살고 있다.
인터뷰를 통해 6.25를 되돌아본 그는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고 불발된 포탄이 옆에 떨어져 흙더미에 파묻힌 내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아. 그저 고향 마을에 살아 돌아온 게 정말 운이 좋았지”라며 감회에 젖었다.
해방 직후 격동의 한반도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낸 98세 어르신이 전해준 이야기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의 일상에 진한 울림을 건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