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섭 회장은 일제 강점기인 1937년 북이면 죽청리 중산(중뫼)에서 황주변씨 동원(東元) 공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뫼는 변회장의 증조부인 진국(鎭國)이 처음 터를 닦아 자작일촌하던 마을이지만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산중의 작은 마을로 변변한 농지라고는 거의 없는 산촌이다.
하지만 그의 증조부를 비롯한 조부와 종조부 등은 모두 유학을 배워 신독(愼獨)하는 한학자였고, 몇 가구 안 되는 동네에 서당을 차려 후학을 가르칠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집안이었다.
그런데도 변태섭회장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6.25 전쟁으로 살상이 일어나자 일가들이 살고 있는 장성읍 장안 그리고 중뫼를 오가는 피난 생활로 인해 상급 학교로 진학할 기회를 놓쳐 한학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늘 새로운 문물과 문명을 배우고 맞이하는 개혁정신과 도전정신이 강했던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 북이면 사거리에 사진관을 열고, 처음으로 창업이라는 길에 나섰다.
죽청리 중뫼에서 농사일로만 살기에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타고난 도전정신이라는 DNA가 미래의 꿈을 개척하는 기업가를 중뫼 산골에 묶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태섭회장이 사거리에서 사진관을 운영할 때부터 그의 타고난 리더십(보스기질)은 많은 후배가 저절로 그를 따르게 하였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외유내강의 타고난 성격은 선비 집안의 타고난 가풍이라는 평을 들었다.
한마을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함께했던 변선의 전 장성군민신문 회장은 “형님(변태섭회장) 보다 네 살이 적은 나는 70년 이상 형님을 따르며, 때론 철없이 행동하고 속을 썪였는데도 한 번도 화를 내신 적이 없다. 그저 나를 믿고 기다리며 지켜보셨다. 그것이 때론 더 아픈 채찍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의 인품과 후배를 대하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기업을 운영할 때는 뚝심과 배짱으로 밀어붙이면서도 선후배들에게는 늘 인자하고 따뜻했던 그는 50여 년 동안 기업을 경영하고 사회생활을 일구어온 대전의 선후배들로부터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변태섭 회장은 일생동안 돈을 쫓아가는 기업인이 아니라 인간 경영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IMF 경제위기 때 그가 창업한 모나리자가 파산 지경에 직면했을 때, 대전 시민과 유지 그리고 다른 기업들까지도 모나리자 살리기에 발 벗고 나섰다는 점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의 절친인 김면규 서울 세무사회 초대 회장은 “IMF 때 대전의 기업인들이 법원에 탄원서를 내 모나리자가 대전의 토착산업이고 중소기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니 모나리자는 반드시 살려달라고 호소하여 판사들이 감동하여 파산선고를 막아내고 기업회생의 절차를 밟도록 하였다. 이는 변 회장이 대전사회에 쏟은 인덕과 공로가 쌓여서 그것이 현실이 되고 결실을 맺은 증거로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닮아 가야 할 기업인의 표상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련은 있어도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변태섭 회장은 1972년 대전에서 쌍마화장지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처음으로 화장지 제조를 시작하였다. 화장지 문화가 대중화되지 못했던 당시에 쌍마화장지공업주식회사는 말이 주식회사일 뿐 사실상 가내 수공업 수준의 작은 회사였다. 변태섭 회장의 화장지 신화는 1976년 동생 변자섭 회장과 함께 모나리자 화장지를 창업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97년에 닥친 IMF 금융위기와 함께 모나리자 화장지 공동 창업자였던 변자섭 회장이 건강을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모나리자 화장지 수도권 영업권을 제 3자에게 매각하면서 수도권 법인의 충청 이남 영업 잠식이 노골화되는 이중고를 겪었다. IMF는 화장지 원료인 펄프를 수입에 의존하는 모나리자 화장지에 파산이라는 위기를 가져왔고, 변태섭 회장은 종업원과 거래업체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기업회생의 절차에 들어갔다.
결국 모나리자 화장지는 외국계 자본에 매각되었고, 큰아들 변재락이 모나리자 화장지에 근무하던 임직원들을 규합하여 2003년 주)미래생활을 창업하였다. 변태섭 회장은 주)미래생활을 창업할 때 명예회장으로 취임하며 변재락 회장이 대전의 대표적인 중견 경영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주)미래생활이라는 회사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변회장은 늘 새로운 미래에 대한 도전 그리고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주)미래생활은 화장지뿐 아니라 미용 티슈, 키친타월 등 화장지의 모든 종류를 제조하며 우리나라 화장지 제지회사 3위의 자리에 올랐다. 미래생활의 대표 브랜드인 ‘잘 풀리는 집’ 화장지는 집들이 선물의 필수품이 되었고, 주)미래생활도 술술 잘 풀리는 회사가 되었다. 현재 제지업계는 유한킴벌리(미국 킴벌리클라크가 지분 70% 소유), 깨끗한나라(LG그룹에서 분리)가 1, 2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외국 자본과 대기업이 아닌 국내 순수중소기업으로는 주)미래생활이 단연 최선두에 나섰다. 변태섭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는 아들 변재락 회장의 뜻을 받아들여 2022년 주)미래생활을 매각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흔들리지 않듯이>
북이면 죽청리 중뫼에 처음 터를 닦은 변태섭 회장의 증조부의 휘(諱)는 진국(鎭國)이요 자는 덕환(德煥)으로 1848년에 출생하여 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조부의 함자는 달연(達淵)이며 부친은 동원(東元)이고, 어머니는 나주오씨다. 나주오씨는 17세에 동원 공에게 출가하여 2남3녀를 두었으나 시집온 지 10년 만인 27세에 홀로되어 5남매를 키워내는 장한 어머니의 표상이 되었다.
변회장은 스물세 살 때 김해가 관향인 김선례 여사와 혼인하여 큰아들 재락과 둘째 재철, 셋째 재영, 넷째 재준 등 네 아들을 두었다. 변회장은 무엇보다 가족의 우애와 화목을 가장 소중한 덕목으로 여겼으며 기업을 경영할 때도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장성읍 장안리 봉암서원 입구에 있는 황주변씨 대문중 사당인 필분제를 건립하기 위해 변태섭 회장을 찾아온 변동권씨(변선의 전 장성군민신문 회장 선친)에게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지 마시라. 제가 동생(공섭)과 상의하여 재원을 마련하겠다”며 흔쾌히 사당 건립비를 희사하였다. 또한 장안리 산중턱에 건립되어 있어서 관리가 부실해 붕괴의 위기에 처한 삼강정려 비각을 봉암서원 입구로 이전 재건할 때도 변태섭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재원을 해 충당해주었다. 삼강정려는 정유재란 때 순의(殉義)한 휴암공 변윤중의 충(忠)과 부인의 열(㤠) 그리고 며느리의 효(孝)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것이다.
이렇게 변회장이 조상의 업적을 기리고 유지하려고 노력한 것은 뿌리가 튼튼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가문의 전통과 조상의 귀중한 유훈을 지키려는 소신이 그의 인생관과 경영철학에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경영인들의 존경을 받는 기업인이 된 것은 결코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학을 배워 터득한 선비정신과 선대로부터 이어온 가문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화장지 제조업계에 신화를 창조한 변회장은 2년 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변태섭 회장의 도전과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본지 회장에 취임한 뒤 매주 대전에서 장성으로 출`퇴근하며 신문 경영에 직접 관여하고, 50년의 경영 노하우를 전달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도연명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귀거래사’라는 유명한 산문시를 썼다. “돌아가련다. 전원이 바로 거칠어지려는데 아니 돌아갈소냐. (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라는 그의 시는 짧으면서도 구성과 표현이 정연한 걸작이며 도연명의 대표작으로서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변태섭 회장은 이제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귀거래사를 쓰고 있다. 변회장의 80년 지기이며 절친인 김면규 전 서울세무사회장은 취임을 축하하는 글에서 “시골 죽청(竹靑) 골짜기에서 태어났으니 푸른 대나무와 같이 항상 푸르고 곧은 인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허물없이 쏟아냈던 일은 나의 기쁨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며 “이제 고향에서 군민들의 찬사와 존경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