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수 단위는 만, 억, 조, 경, 해, 극, 항하사, 불가사의, 무량대수 등으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가장 작은 수는 1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0은 존재하지 않는 수이며 없는 것 곧 무(無)라고 여겼다. 1500여 년 전 인도 수학자 브라마굽타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태 곧 무(無)의 상태를 제로(ZERO)라고 부르고 0을 실제 수라고 주장하였다.
0이 실제 수가 아니면 10과 100 그리고 1000이 다르지 않다. 0은 제로라고 표현하지만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 수이다. 서양에서는 0을 신의 영역으로 여겼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신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0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무(無)와 유(有)를 분리하지 않았다. 동양철학의 기본으로 삼는 주역에서 태극이 곧 무극이다. 태극은 음양이고 존재하는 것이며 무극은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인데 이 둘이 같은 것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필자는 태극과 무극을 설명할 때 팔랑개비 이론을 응용한다.
태극의 모양인 음과 양을 정지 상태에서 보면 분명 음과 양이 존재하지만 빨리 돌아가는 팔랑개비가 그 모양을 알 수 없듯이 태극의 모양을 빨리 회전하면 음과 양은 구분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공간적 측면에서는 존재하지만 시간적 측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태극과 무극이다.
불교의 금강경에 핵심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다. 공(空)은 무(無)의 개념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다. 유와 무를 초월한 것이 공이다. 지구에 대기는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넓이와 크기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크다. 진공(眞空)의 상태는 대기마저 없는 순수한 비움이다. 빅뱅에서 블랙홀이 일어나 우주가 창조된 것처럼 진공의 상태가 그 어떤 자극에 의해 폭발하여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공이 곧 색이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였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는 상대적이다. 보고, 느끼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다른 물질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틀리지 않고, 존재한다고 해도 맞는 답이 된다. 없다고 정의하는 0과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1은 사실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1이라는 하나만 있을 때 1은 존재를 자각하지 못한다.
서양의 종교에서는 무(無)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은 죽어서도 그 영혼이 천당으로 가거나 지옥으로 간다. 하지만 불교에서 최고의 죽음은 열반 즉 적멸(寂滅)이 되어 윤회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다.
물결에는 물이 필요하고 소리에는 공기가 필요하며 지진파에는 땅덩어리가 필요하지만 빛은 진공에서도 진행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형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빛은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빛은 무와 유 그리고 공과 색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수와 존재에 대해 구구절절 논한 까닭은 가장 큰 수, 가장 광활한 존재는 무엇일까를 찾아보기 위함이다. 0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에 0을 더하면 10이 되고, 또 0을 더하면 그 수의 10배가 된다. 따라서 0은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며 무한히 큰 수다. 0을 더할 때마다 그 수가 커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0을 찾는 것이 아니라 1을 소유하고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0이라는 무소유가 하나씩 더할수록 그 수가 10배로 커지듯 버리고 나눌 때 남아있는 가치는 10배가 된다.
그래서 가장 아름답게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은 나누고, 베푼 사람들이다.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외롭고 쓸쓸한 이웃이 적지 않다. 비움과 나눔이라는 0을 하나씩 채우는 한가위가 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