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은 고령 사회를 넘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다가오고 있는 초고령 사회를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초고령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초고령 인구 당사자들의 건강과 행복이다. 오늘은 특기인 색소폰으로 건강과 행복을 모두 챙기고, 군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89세 김병년 옹을 만나 보았다.
89세라는 긴 삶을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하다.
6.25 때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부모님께 북하면에 사시는 할머니를 모시라는 말씀을 듣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후에 형님까지 합류했는데, 짚으로 새끼를 꼬아 신발을 만들던 와중 빨치산이 들어와서 부모님을 내놓으라고 하며 우리 형제를 그 새끼줄에 묶어 끌고 갔다. 중학생이어서 한자를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에 끌고 가야 할 사람 명단에 우리 가족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형님은 일본도 칼집으로 다리를 맞고 다리를 평생 절게 되었으며, 나는 귀를 맞아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빨치산 대장이 우리를 때리던 대원의 어깨를 치며 명단에도 없는 사람을 데려오면 어떡하냐고 다그쳤다. 나중에 20연대가 장성을 수복한 후 아버지로부터 알게 된 사실은, 그 대장은 일제강점기 때 공출을 피해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가는 심한 동상을 입었을 때 아버지가 그 사람 대신 공출을 내 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훗날 그 사람이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은 “그분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어려운 일 있으면 도움을 드려라.”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 말에 따라, 나도 남을 많이 도우려 한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약수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아 1년 반 정도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군대를 가지 않으면 퇴직시키겠다고 하여, 하는 수 없이 군대에 다녀왔고 전역 후 장성중앙초등학교에서 8년을 근무했다. 근무할 적에 성적이 좋았는지, 교육청으로 발령받아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육청 생활은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았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던 나의 가치관과 금전이 쉴 틈 없이 오가는 교육청 내부는 맞지 않았다. 교육청마저 이렇게 부패했다면 다른 곳은 어떻겠는가? 결국 교육청에서 2년 8개월 근무 후 퇴직하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우체국 앞에서 철물점을 운영하셨는데, 교사가 된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반대가 심하셨다. 그러나 퇴직하고 나선 결국 아버지의 철물점을 이어서 하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말씀대로 된 것 같다.
교직에 있을 적에, 약수초등학교에서 4학년 담임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면장 아들이 우리 반이었는데, 나는 그 아이 대신 다른 아이에게 반장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 아이는 순창군 복흥면에서 홀어머니랑 살던 아이였는데, 눈이나 비가 오면 산길을 넘어갈 수 없으니 어머니 걱정에 수업 시간에도 눈물을 흘리던 아이였다. 딱한 사정을 알다 보니, 그런 날이면 그 아이를 집에서 하룻밤 정도 재워 주기도 했다. 훗날 철물점에서 일하고 있던 적에, 성인이 된 그 아이가 8폭 병풍을 들고 찾아왔다. 졸업하고 난 후 중학교를 가진 못했으나 사찰에서 스님 밑에서 공부하고, 나중에 미술을 배워 대학과 대학원까지 마치고 단청 장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뻤다. 또, 명절 때면 중앙초등학교 시절 가르쳤던 제자들이 종종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정으로 사람을 대해 주면 언젠간 좋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색소폰은 언제부터 연주하게 되셨는지?
사범학교를 다닐 때 밴드부를 했다. 밴드부 지도 교수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광주시내에 행사가 많다 보니, 밴드부가 행사에 가서 연주할 때가 있었다. 교수님은 아무래도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다 보니 행사 지휘를 못 할 때가 많았는데, 그래서 내게 악대장을 맡겨 주셔서 악보 보는 법도 익히고, 악기고 열쇠도 주셨다. 악기고 열쇠가 나에게 있다 보니 형님 결혼식 때도 악대를 이끌고 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철물점을 물려받아 계속 운영하다가 5년 전에 그만두었다. 교직을 그만둔 후 장사하는 데에만 힘을 기울이다 보니 모든 것을 잊고 살았다가, 철물점을 그만둔 후에 다시 색소폰을 잡게 되었다.
JS색소폰동호회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 주셨으면 한다.
우리 동호회는 18인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 12인의 정예 멤버들이 합주나 독주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황룡강 축제에서 합주와 독주를 동시에 한 적도 있다. 독주 실력을 관객들이 좋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색소폰을 다시 잡은 후에, 주변에서 그 나이에 그렇게까지 할 수 있냐는 반응이 많다. 또, ‘당신만큼만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말들을 참 많이 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요즘 같은 고령 사회에서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선생님처럼 취미를 갖고 즐겁게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좋은 말씀이다. 당시 막 시작할 때 ‘나도 뭔가 취미 활동을 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시작했다. 집에서 혼자 있는 것보단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하고 보니 가장 우선적으로는 건강에 도움이 됐다. 색소폰은 불어서 연주하는 악기이다 보니 숨쉬는 것도 더 편안해졌고, 전반적으로 폐 건강이 훨씬 더 좋아졌다.
이제 가을이다 보니 지역 축제들이 우리 군 곳곳에서 개최된다. 남은 2024년의 활동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
올해는 각각 읍·면 단위에서 축제를 많이 열고 있다. 삼계면, 북이면, 서삼면 축제에 참석할 예정이고 가장 큰 공연으로는 다음 주에 개최되는 황룡강꽃축제에 참석해 많은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담고 싶습니다~~